2012년 9월 10일 월요일

성웅 이순신 장군 3- 백의종군,명량해전



<한산도 대첩 이후의 경과>

한산도 대첩 승리 이후, 이순신의 조선군은 7월 10일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지휘하는 왜선 42척을 추가로 격파하고 왜군 250명을 바닷속에 수장시키고  돌아오지.




조선군 전사자 19명.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지금까지의 전투 중 가장 피해가 컸던 혈전(?) 이었다고 해.


안골포 해전 뒤에도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소규모로 함대를 분산시켜 남해안 청소에 나서지.

2~10척 정도를 1조로 해서 사방에 전선을 뿌린 다음, 왜선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무차별 공격으로 수장시켰어.

약 6번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는데

모두 결과를 묶어서 적어보자면


(장림포, 화준 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해전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자, 부상자 없음

일본군 피해 : 34척 침몰, 전사자 약 2천명.


















".............시발."                   ㄴ 가토 요시아키


그리고 이순신의 함대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직접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8월 24일 전선 470척, 병력 7만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지.

이때 왜군의 요격 함대를 5번 궤멸시키고,

부산포 앞바다에서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군과 정면으로 충돌해.

































결과는 이순신 함대의 대승.

조선군 피해 : 0척, 6명 전사, 25명 부상.

일본군 피해 : 128척 격침, 3800명 전사.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꼈던 녹두 만호 정운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ㄴ 이순신 함대 돌격대장 정운.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



하다가 저격당해 전사.



이렇게 왜군들을 싹싹 쓸어버리자, 왜군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격분했고

























이순신의 함대와 마주치지 않도록, 일본 해군 전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지.

모든게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 같았던 그때...






























자신과 함께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어.

본래 이순신 장군 자체가 사람 평가에 상당히 까다로웠다고 알려져 있고,

또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전보를 알릴 때, 공을 세운 장수에서 원균을 빼 버렸지.
























당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원균을 <원흉(元凶)>이라고 존나게 뒤담화를 까댔지.

위에서 이순신이 원균의 이름을 공적에서 뺀 이유는

당시 전투에서 보고서에는 장군들이 직접 개별적으로 자신의 전공을 적어 제출하는 게 규칙이었지.

이때 원균은 "한 일은 없는데, 일단 수장 가오도 있고, 상도 받고 싶으니. 이순신과 공동으로 제출하자."

이런 생각으로 이순신에게 부탁했는데





























"좆까 씹새야."
철저한 원리원칙 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이순신이 원균의 부탁을 씹어버리지.

이에 원균은 앙심을 품고, 이때부터 이순신 까대기의 선두주자인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을 까는데 주력하지.

그렇게 불안불안 하던 상황에서

사고가 터지고 말지.








ㄴ 가토 기요마사.





일본에 심어놓은 조선군 첩자인 요시라가 조선 군에 정보를 하나 흘리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토가 바다를 건널 때 그의 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여기서 이순신이 이에 항명해서 투옥되었다는 설이 유명한데 이건 잘못된 기록이야.


실제 사건의 전말은 이래.

조선 해군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가

위에서 서술한 요시라가 가토가 부산으로 온다는 정보를 흘리지.

(근데 이 요시라가 실은 이중첩자. 즉 고니시가 일부러 조선군에 심어 놓고 조선 첩자로 위장한 이중 스파이)

하지만 이순신은 가토를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다시 절영도로 후퇴를 해.

이 과정에서 가덕 왜성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지. (전사 1명. 포로 5명)

이에 격분한 이순신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덕 왜성으로 가서 무차별 포격을 퍼붓고, 일본군을 항복시킨 다음

포로 5명을 모두 반환받고 돌아오던 중이었어.



























하지만 이 사실이 선조에게 엉뚱하게 전달되면서

"가토를 잡으라고 부산에 보냈더니, 잡으라는 가토는 놓치고 애꿎은 피해만 입고 돌아왔다."

라는 죄명으로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시키는 병크를 터트리고 말지.

결국 왜군의 계략에 의해 이순신은 투옥되고 원균이 이순신의 후임으로 들어서지.









이때 이순신은 상당히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압슬> 이라고, 깨진 도자기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린 다음 무릎 위에 돌들을 올리는 고문까지 당해

정강이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지.

이 이후로 이순신은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지면서 자주 잔병치레를 앓게 돼.


























계속되는 고문 끝에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에 겨우 풀려나지.

이때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면사첩 (죄를 면해줌)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오게 돼.


ㄴ 왜선 수백척과 1만이 넘는 왜군을 격파한 장군에게 선조가 내린 것은 죄를 면하여 준다는 서류 한장 뿐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이 돌아왔을때

남아 있었던 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궤멸당한 조선 수군의 일부였지.


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남아 있던 함대 169척 중, 경상 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던 배 12척을 남기고 모두 침몰해버렸지.

이순신을 도와 싸웠던 장수들인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수만명의 조선군도 전사하거나 모조리 육지로 도주해버렸지.






















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남아 있던 함대 169척 중, 경상 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던 배 12척을 남기고 모두 침몰해버렸지.

이순신을 도와 싸웠던 장수들인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수만명의 조선군도 전사하거나 모조리 육지로 도주해버렸지.
























이순신이 그동안 양성해 놓은 조선의 수군들이 단 한 순간의 전투로 전멸해버린 상황.

당황한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급히 임명했지만

이미 남은 전력은 배 12척.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왜군 330척이 명량 앞바다로 몰려오기 시작했어.

여기서 그 유명한 이순신의 장계가 등장하는데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설의 전투가 시작되는데,

세계 해전 역사상 조선에게는 희대의 승리, 일본에게는 희대의 패배가 된 전투...










바로 <명량 해전>이지.


(전쟁 직전의 상황)

<조선군>

- 총 전선 13척. (1척 보강).
- 조선군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짐
-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투 직전 도주
- 이때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3일간 끙끙 앓음

기함
수군통제사 이순신 - 대장선(1척)
중위
경상우도 미조함첨사 김응함 - 중군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영등포만호 조계종 - 척후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안골포만호 우수(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거제현령 안위(1척) (실록 난중일기)
경상우도 평산포대장 정응두(1척) (실록) 좌위
전라우수사 김억추(1척) (난중일기)
전라우도 가리포첨사 이응표(1척) (해전 직후 전라우수사로 포상 받음)
전라우도 해남현감 류형(1척) (난중일기 및 행장 등에서 추정) 우위
전라좌도 조방장 배흥립(1척) (실록)
전라좌도 회령포만호 민정붕(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발포만호 소계남(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녹도만호 송여종(1척) (실록)
총합 영관급 지휘관 포함, 수군 총괄 약 2400명 가량




<일본군>

- 총 전선 330척.
- 총 사령관 토도 타카토라
-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치스카 이에마사, 모리 다카마사, 구루지마 미치후사 참전


 
그야말로 12 : 330

절대적 열세의 상황이었지.

그리고 9월 16일 전투가 시작되었어.





"적선 2백여 척이 몰려오니 제장들을 불러 거듭 싸우기를 약속하고 바다로 나갔다. 


    명량 앞바다에 이르자 왜선 130여 척이 우리들을 에워쌌다."  - 난중일기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순신의 기함이 선두에 서서 전진했지.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터지고 말아.




















ㄴ 선두에 서서 홀로 싸우는 이순신의 기함


13척의 배 중에서 12척이 모두 후방으로 물러서 있었던 거지.

안위, 송여종, 배흥립, 이응표 등 지금까지 용맹히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도 겁을 먹고 후퇴했으며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벌써 자신의 배를 수 킬로미터 뒤로 빠지며 꼬리를 보이고 있었어.





이때 이순신은 단 한 척의 배로 적진으로 들어가 단독으로 20여 척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지.

그리고 곧 초요기를 세워 전선들을 소집했어.

배들이 쭈뼛쭈뼛 다가오자 이순신은 먼저 안위의 배로 달려 들어가 안위에게 칼을 겨누고 말했어.

"안위야 네가 내 칼에 죽고 싶으냐? 아니면 싸우다가 장군답게 죽을래?

그리고 뒤따라온 김응함의 배에 대고 이렇게 말했지.

"너는 중군장으로서 대장인 나 안 도와주고 뒤에서 숨어?

 당장 저세상으로 보내도 시원치 않을 판이지만 워낙 적군이 많으니 일단은 살려 둘 테니 잘 싸우는게 좋을 것이다"







이에 모든 이순신의 전함들이 합세해서 적을 공격하기 시작하지.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장 구루시마를 발견하고 그를 끌어올려 목을 쳐버려.

구루시마의 목을 대장기에 걸고 일본군에게 맹폭을 가했지.


이때 해류의 방향이 바뀌며 일본 함대는 그 자리에서 전열이 무너졌고

13척의 조선 함대가 일제히 포격을 가하자

스스로 대열을 무너트리면서 자멸하게 돼.

믿을 수 없는 완승을 거둔 거지.



<전투 결과>

조선군 : 피해 0척. 전사 2명.


일본군

- 이순신이 독고다이로 격침시킨 전함 31척. 그외 피해 다수. (피해를 입지 않은 온전한 전함 10척)

- 90척 중파. 8000명 전사

-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 전사

- 사령관 토도 타카토라 부상(화살 맞고 물에 빠짐)

- 모리 다카마사 물에 빠짐 (당시 최후방 포진)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

울둘목에서 이 전투를 숨어서 지켜보던 모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할 정도의 말 그대로 기적이었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돼.

게다가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작살내자

칠천량에서 도주했던 수군 장수들과 병사들이 이순신의 복귀를 알고 속속 합류하지.

그리고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전의 조선 함대의 모습을 다시 갖출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이 전체 철수를 감행하지.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의 수군과 함께,

도망치는 일본군을 바다에 쓸어넣기 위해 노량 앞바다로 향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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