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0일 월요일

성웅 이순신 장군 3- 백의종군,명량해전



<한산도 대첩 이후의 경과>

한산도 대첩 승리 이후, 이순신의 조선군은 7월 10일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지휘하는 왜선 42척을 추가로 격파하고 왜군 250명을 바닷속에 수장시키고  돌아오지.




조선군 전사자 19명.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지금까지의 전투 중 가장 피해가 컸던 혈전(?) 이었다고 해.


안골포 해전 뒤에도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소규모로 함대를 분산시켜 남해안 청소에 나서지.

2~10척 정도를 1조로 해서 사방에 전선을 뿌린 다음, 왜선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무차별 공격으로 수장시켰어.

약 6번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는데

모두 결과를 묶어서 적어보자면


(장림포, 화준 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해전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자, 부상자 없음

일본군 피해 : 34척 침몰, 전사자 약 2천명.


















".............시발."                   ㄴ 가토 요시아키


그리고 이순신의 함대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직접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8월 24일 전선 470척, 병력 7만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지.

이때 왜군의 요격 함대를 5번 궤멸시키고,

부산포 앞바다에서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군과 정면으로 충돌해.

































결과는 이순신 함대의 대승.

조선군 피해 : 0척, 6명 전사, 25명 부상.

일본군 피해 : 128척 격침, 3800명 전사.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꼈던 녹두 만호 정운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ㄴ 이순신 함대 돌격대장 정운.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



하다가 저격당해 전사.



이렇게 왜군들을 싹싹 쓸어버리자, 왜군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격분했고

























이순신의 함대와 마주치지 않도록, 일본 해군 전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지.

모든게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 같았던 그때...






























자신과 함께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어.

본래 이순신 장군 자체가 사람 평가에 상당히 까다로웠다고 알려져 있고,

또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전보를 알릴 때, 공을 세운 장수에서 원균을 빼 버렸지.
























당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원균을 <원흉(元凶)>이라고 존나게 뒤담화를 까댔지.

위에서 이순신이 원균의 이름을 공적에서 뺀 이유는

당시 전투에서 보고서에는 장군들이 직접 개별적으로 자신의 전공을 적어 제출하는 게 규칙이었지.

이때 원균은 "한 일은 없는데, 일단 수장 가오도 있고, 상도 받고 싶으니. 이순신과 공동으로 제출하자."

이런 생각으로 이순신에게 부탁했는데





























"좆까 씹새야."
철저한 원리원칙 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이순신이 원균의 부탁을 씹어버리지.

이에 원균은 앙심을 품고, 이때부터 이순신 까대기의 선두주자인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을 까는데 주력하지.

그렇게 불안불안 하던 상황에서

사고가 터지고 말지.








ㄴ 가토 기요마사.





일본에 심어놓은 조선군 첩자인 요시라가 조선 군에 정보를 하나 흘리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토가 바다를 건널 때 그의 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여기서 이순신이 이에 항명해서 투옥되었다는 설이 유명한데 이건 잘못된 기록이야.


실제 사건의 전말은 이래.

조선 해군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가

위에서 서술한 요시라가 가토가 부산으로 온다는 정보를 흘리지.

(근데 이 요시라가 실은 이중첩자. 즉 고니시가 일부러 조선군에 심어 놓고 조선 첩자로 위장한 이중 스파이)

하지만 이순신은 가토를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다시 절영도로 후퇴를 해.

이 과정에서 가덕 왜성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지. (전사 1명. 포로 5명)

이에 격분한 이순신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덕 왜성으로 가서 무차별 포격을 퍼붓고, 일본군을 항복시킨 다음

포로 5명을 모두 반환받고 돌아오던 중이었어.



























하지만 이 사실이 선조에게 엉뚱하게 전달되면서

"가토를 잡으라고 부산에 보냈더니, 잡으라는 가토는 놓치고 애꿎은 피해만 입고 돌아왔다."

라는 죄명으로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시키는 병크를 터트리고 말지.

결국 왜군의 계략에 의해 이순신은 투옥되고 원균이 이순신의 후임으로 들어서지.









이때 이순신은 상당히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압슬> 이라고, 깨진 도자기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린 다음 무릎 위에 돌들을 올리는 고문까지 당해

정강이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지.

이 이후로 이순신은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지면서 자주 잔병치레를 앓게 돼.


























계속되는 고문 끝에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에 겨우 풀려나지.

이때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면사첩 (죄를 면해줌)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오게 돼.


ㄴ 왜선 수백척과 1만이 넘는 왜군을 격파한 장군에게 선조가 내린 것은 죄를 면하여 준다는 서류 한장 뿐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이 돌아왔을때

남아 있었던 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궤멸당한 조선 수군의 일부였지.


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남아 있던 함대 169척 중, 경상 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던 배 12척을 남기고 모두 침몰해버렸지.

이순신을 도와 싸웠던 장수들인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수만명의 조선군도 전사하거나 모조리 육지로 도주해버렸지.






















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남아 있던 함대 169척 중, 경상 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던 배 12척을 남기고 모두 침몰해버렸지.

이순신을 도와 싸웠던 장수들인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수만명의 조선군도 전사하거나 모조리 육지로 도주해버렸지.
























이순신이 그동안 양성해 놓은 조선의 수군들이 단 한 순간의 전투로 전멸해버린 상황.

당황한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급히 임명했지만

이미 남은 전력은 배 12척.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왜군 330척이 명량 앞바다로 몰려오기 시작했어.

여기서 그 유명한 이순신의 장계가 등장하는데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설의 전투가 시작되는데,

세계 해전 역사상 조선에게는 희대의 승리, 일본에게는 희대의 패배가 된 전투...










바로 <명량 해전>이지.


(전쟁 직전의 상황)

<조선군>

- 총 전선 13척. (1척 보강).
- 조선군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짐
-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투 직전 도주
- 이때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3일간 끙끙 앓음

기함
수군통제사 이순신 - 대장선(1척)
중위
경상우도 미조함첨사 김응함 - 중군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영등포만호 조계종 - 척후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안골포만호 우수(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거제현령 안위(1척) (실록 난중일기)
경상우도 평산포대장 정응두(1척) (실록) 좌위
전라우수사 김억추(1척) (난중일기)
전라우도 가리포첨사 이응표(1척) (해전 직후 전라우수사로 포상 받음)
전라우도 해남현감 류형(1척) (난중일기 및 행장 등에서 추정) 우위
전라좌도 조방장 배흥립(1척) (실록)
전라좌도 회령포만호 민정붕(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발포만호 소계남(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녹도만호 송여종(1척) (실록)
총합 영관급 지휘관 포함, 수군 총괄 약 2400명 가량




<일본군>

- 총 전선 330척.
- 총 사령관 토도 타카토라
-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치스카 이에마사, 모리 다카마사, 구루지마 미치후사 참전


 
그야말로 12 : 330

절대적 열세의 상황이었지.

그리고 9월 16일 전투가 시작되었어.





"적선 2백여 척이 몰려오니 제장들을 불러 거듭 싸우기를 약속하고 바다로 나갔다. 


    명량 앞바다에 이르자 왜선 130여 척이 우리들을 에워쌌다."  - 난중일기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순신의 기함이 선두에 서서 전진했지.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터지고 말아.




















ㄴ 선두에 서서 홀로 싸우는 이순신의 기함


13척의 배 중에서 12척이 모두 후방으로 물러서 있었던 거지.

안위, 송여종, 배흥립, 이응표 등 지금까지 용맹히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도 겁을 먹고 후퇴했으며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벌써 자신의 배를 수 킬로미터 뒤로 빠지며 꼬리를 보이고 있었어.





이때 이순신은 단 한 척의 배로 적진으로 들어가 단독으로 20여 척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지.

그리고 곧 초요기를 세워 전선들을 소집했어.

배들이 쭈뼛쭈뼛 다가오자 이순신은 먼저 안위의 배로 달려 들어가 안위에게 칼을 겨누고 말했어.

"안위야 네가 내 칼에 죽고 싶으냐? 아니면 싸우다가 장군답게 죽을래?

그리고 뒤따라온 김응함의 배에 대고 이렇게 말했지.

"너는 중군장으로서 대장인 나 안 도와주고 뒤에서 숨어?

 당장 저세상으로 보내도 시원치 않을 판이지만 워낙 적군이 많으니 일단은 살려 둘 테니 잘 싸우는게 좋을 것이다"







이에 모든 이순신의 전함들이 합세해서 적을 공격하기 시작하지.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장 구루시마를 발견하고 그를 끌어올려 목을 쳐버려.

구루시마의 목을 대장기에 걸고 일본군에게 맹폭을 가했지.


이때 해류의 방향이 바뀌며 일본 함대는 그 자리에서 전열이 무너졌고

13척의 조선 함대가 일제히 포격을 가하자

스스로 대열을 무너트리면서 자멸하게 돼.

믿을 수 없는 완승을 거둔 거지.



<전투 결과>

조선군 : 피해 0척. 전사 2명.


일본군

- 이순신이 독고다이로 격침시킨 전함 31척. 그외 피해 다수. (피해를 입지 않은 온전한 전함 10척)

- 90척 중파. 8000명 전사

-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 전사

- 사령관 토도 타카토라 부상(화살 맞고 물에 빠짐)

- 모리 다카마사 물에 빠짐 (당시 최후방 포진)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

울둘목에서 이 전투를 숨어서 지켜보던 모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할 정도의 말 그대로 기적이었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돼.

게다가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작살내자

칠천량에서 도주했던 수군 장수들과 병사들이 이순신의 복귀를 알고 속속 합류하지.

그리고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전의 조선 함대의 모습을 다시 갖출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이 전체 철수를 감행하지.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의 수군과 함께,

도망치는 일본군을 바다에 쓸어넣기 위해 노량 앞바다로 향하게 되는데.........




성웅 이순신 장군 2-한산도 대첩



<2부  한산도 대첩>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점차 사기가 오르고

마침내 이에 고무되어 이순신을 밀어내고 해상 루트를 다시 장악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대장으로 한 일본 수군 73척. 1만명이 가덕도로 접근해 육군과 연계를 시작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던 이순신 장군은 다시 출격을 명령하지.























그리고 마침내 이순신 장군이 정한 전투지는 바로 <한산도>

이 한산도가 참 교묘한 지형인 것이 수비하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위급 상황시 뒤로 빠져나가기 쉽고

일본군이 상륙한다 하더라도 민가가 없어 굶어죽기 딱 좋은 지형이야.

이 바다에 있는 호랑이 아가리로 일본군을 유인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좌우측 섬들 사이에 경상 우수군, 전라 우수군을 복병으로 감춰두고

직접 전라 좌수군 함대를 이끌고 적과 맞서지.















조선의 선봉 함대가 자신들보다 적다는 것을 눈치챈 와키자카는 그대로 공격을 명령.

그때 이순신의 함대가 취하고 있던 진형은 일자진(어린학익진)으로

전함도 열세였던 데다가 측방이 취약한 진형이었어.

이를 노리고 와키자카는 숫적 열세 + 측방 압박 을 노리고 이순신 함대를 공격하지.

하지만 이것이 전부 작전...


















정신없이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이순신의 함대가

갑자기 정지. 그리고 함대를 선회시켜 방향을 전환하고 커다란 원형의 학익진을 펼치지.

이때도 와키자카는 계속 돌격을 명했어.

왜냐하면 아직 조선의 함대가 숫적 열세라서 완전한 학익진을 구성하기 어려웠고

또한 해전에서 이러한 거대한 원형 학익진을 사용한 전례가 없었거든

즉, 와키자카는 기존의 해전 상식으로 자신이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던 거지.

그 순간

좌우 양익에 매복하고 있던 경상 우수군, 전라 우수군의 수군들이 달려나와

정면으로 돌격해오던 일본 함대의 좌우 양익을 완벽하게 2중으로 포위해버리지.














즉, 처음부터 이순신의 전라 좌수군 부대가 어설픈 일자진으로 적을 유인

-> 적을 한산도 해역으로 끌고 들어옴

-> 전라 우수군, 경상 우수군 부대 복병 발동

-> 전 함대 반전 및 일제 사격


이순신의 완벽한 전술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것.


그리고.....



















"FIRE!!!!!!!!!!!!!!!!!!!!!!!!!"

조선군 함대의 일제 포격이 시작되고

일본군은 그제서야 도망치려 하지만 이미 쌍학익진으로 완벽하게 퇴로가 포위되어 버린 터라

도망도 못치고 그대로 허우적대다 궤멸.

일본군 함대 73척 중 70척이 궤멸하고

1만명의 수군 중 생존자는 고작 400명.(와키자카 포함)

이들은 한산도에 겨우 상륙하지만 위에 써 놓은 것처럼 식량 조달 불가능ㅋㅋㅋㅋ

















13일간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뗏목을 만들어 겨우 탈출에 성공하지.

그야말로 완벽한 대승.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19명 전사, 116명 부상

일본군 피해 : 59척 격침, 14척 나포. 9600명 전사. 300명 아사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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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산도 대첩의 결과

일본군은 그나마 살려보려 하던 기세가 꺾이고 해상의 장악을 완전 포기하게 되지.

















ㄴ "이순신... 이순시이이인!! 으아아아 씨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일본군의 본래 계획인 해상 보급 작전은 그야말로 대실패.

평안도까지 올라간 고니시의 군대가 남하해야 했고

조선의 육군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명나라의 지원이 시작.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바꿔놓은 전투> 라고 하겠음.


















<보너스>

* 충무공 휘하의 부하들은 대부분 어떻게 죽었을까?

조선군의 군율은 그야말로 가혹한 레벨.

조선 수군들 사이에선 일본 수군 < 이순신. 정도로 공포의 레벨이 달랐다.

이는 객관적 기록에서도 알 수 있는데

충무공이 지휘한 조선군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배 : 0척

전사 + 부상자 : 100여 명

반면

군율에 의해 처형당한 병사 +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 = 10000여 명.

이 세상에

전투 사상자 : 비전투 손실 = 1 : 100인 군대가 또 얼마나 존재할지 의문이다.



2012년 9월 9일 일요일

성웅 이순신 장군 1- 임진년 전설의 시작

시작하기 전에 묵념이라도 5초 올리고 감상하도록 하자구.
























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
1545.3.8(음력)~1598.11.19(음력)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제 1. 임진년. 전설의 시작.


"석 자 칼로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다(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우선 32살에 무과에 늦깍이로 급제한 이순신은

북방의 여진족들을 조금 상대하다가

불알친구인 류성룡의 천거로 포풍같은 승진을 하게 되지.

이런 저런 인사발령에 휘둘리던 이순신은 마침내 자신의 전설을 알릴 무대인 바다에 도착해. 

1591년 47세로 정3품 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던 거지.

당시 전라 좌수영은 5과 5포. 즉 5개의 고을과 5개의 군사 기지를 담당하던 군단으로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병력을 증강시키고, 배를 건조하고, 또 거북선의 제작에 들어가는 등 전력강화에 힘쓰지.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어.

<임진 왜란 발발.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군대를 3개로 나누어 조선을 기습공격하였지.

당황한 조선군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박살나고

결국 전쟁 발발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지.









"이 새끼들이?"















"내가 직접 나서겠다!"











드디어 전쟁 발발 1달 만인 5월 4일.

영광의 이순신 함대 첫 출격.


















여기서 잠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의 핵심을 말해보자면

바로 "전투의 우위성을 선점한다"

이순신 장군은 언제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수적, 화력의 우위를 준비한 다음 전투에 나섰고

어쩔 수 없이 전력이 대등 또는 열세인 상황이라면 첩보, 전술, 지형 등

가능한한 모든 이점을 총 동원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로, 적의 피해는 최대로, 전투 시간은 최단으로, 전투 피해는 최장으로

이 모토를 유지했지.




<옥포 해전> 5월 4일

첫 출전. 옥포만에서 토도 타카토라의 선단과 마주함.

교전 끝에 왜선 26척 전원 침몰시킴.

아군 피해 : 부상자 2명


돌아오는 길에 적진포와 합포에 들려

각각 왜선 5척과 15척을 침몰시키고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2명 부상

일본군 피해 : 46척, 6920명 전사.






<사천 해전> 5월 29일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 26척이 출격.

사천에서 왜선 13척을 전멸시킴.

이때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됌.



















ㄴ 통영시 강구항에 전시중인 거북선


철갑으로 무장한 돌격선 거북선의 난입으로 왜군은 혼비백산.

처절하게 짓밟히며 2연패.

이 전투에서 충무공이 적탄에 피격당하는 사고가 일어남.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자 없음. 부상자 : 이순신(사령관), 나대용(나대다가 총맞음 ㅈㅅ)

일본군 피해 : 13척, 2600명 전사.







<당포 해전> 6월 2일



















ㄴ 당시 조선군 주력함대 판옥선.


왜선들이 당포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진.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함대 21척을 전멸시킴.

왜장 구루시마 전사.


















당포 해전 승리 후, 다시 수색선을 사방에 뿌려

왜선들이 당항포, 율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포착.

곧바로 출격하여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시킴.

당당히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하고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하사받음.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 11명.

일본군 피해 : 당포, 당항포, 율포 합쳐서 67척 침몰, 8140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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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7월 4일.


이순신 한산도로 출격!










2부에서 계속......







<보너스>

* 이순신의 키는?

- 최근까지 2미터 50센티라는 학설이 돌았으나, 개소리로 판명났고.

   당시의 조선인 평균 신장과 이순신의 남아있는 갑옷의 크기로 분석하여

   약 6척 (180cm)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순신의 장군도가 2미터에 달해서 이런 이순신 거인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 백성들에게 이순신 장군이란?

- 부임 초기 : 지독한 관리

- 임진왜란 개전 : 존나 지독한 관리

- 투옥된 후 : 그리운 임

- 백의종군 : 존나 지독하지만 그래도 그리웠던 임.


이순신은 스스로가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다스리던 전라 좌수영의 5고을 백성들은

거의 매일같이 이순신의 징집에 응해 수군 훈련을 받고, 노가다로 끌려 나와 배를 건조, 수리하는데 동원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력을 차출해 간 사명대사를 <치졸한 중놈>이라고 욕하며 분노하기도 했다.























또한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훈련을 받다가 병사들이 탈영하면

그의 가족들을 끌어와 엄히 처벌했으며,

규율을 강력하게 적용해 수많은 병사들을 전쟁 일어나기도 전에 처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군들은 이순신을 "능력있지만 너무 지나친 장군님"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고 백성들이 다 죽게 생기자

 백성들은 그제야 충무공의 위대함을 알고 장군이 돌아오자 울며 절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충무공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등 충무공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고 전해진다.

세계2차대전 당시의 명언들



아돌프 히틀러
독일 나치의 수장

"이제부터 대 도이치 역사엔 '항복' 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전세계에 선언하노라 "
"대중의 수용성은 아주 한정되고 지성은 작다. 그러나 대중의 망각능력은 엄청 대단하다"
"내가 결코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항복이다"
"전쟁이 시작될땐 정의보다 승리가 우선이다"
"지키던지 아니면 몰락하라"

룸멜
독일군기갑단장

"용기있게 행동하라, 불운하다면 불행에 맞서라"
"하나의 철 십자 훈장보다는, 하나의 탱크와 기름을 다오"
"기사란, 옷과칼은 피에 물들어도 마음만은 순백, 그것이 기사다"
"모험을시도하라, 그러나 도박은하지말라,"
"내가 처음으로받은 것은 총이오, 마지막으로 받은것도 총이오"


에리히 레더
독일해군 대제독

"이제 독일해군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한 멋지게 죽는방법을 찾는 것이다"


처칠
영국총리

"영국은 모든 전쟁에서 패할 것이다. 최후의 전쟁을 뺴놓고서는.."
"런던이 점령된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이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오"
"구식 무기로 현대전을 이끌어야만 하겠군!"
"원니가 돌아왔다!"
"결코 양보하지마라.결코 굴하지마라, 결코, 결코,결코,위대한것이든 사소한것이든, 커다란것이든, 시시한것이든 결코 굴하지마라"
"이전쟁은 비극이며, 이세계에서 없어져야되는 역사이다"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군 장군이자 총지휘관

"나의 기갑부대는 2개군단이상의 가치가 있다"
"여러분은 나를 잘모르고 나또한 여러분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팀으로써 이런자신감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전선에서 승리할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후퇴란없습니다"


드골
프랑스육군사령관이자 정치인

"우리는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선 아직 지지않았다"
"칼은 부러졌다. 그러나 나는 부러진칼을 잡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만약 제 3차세계 대전이 일어난거든 즉시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인 나, 드골을 깨워라!"
"내가 곧 프랑스다"


한스프랑크
폴란드총독, 독일정치인

"총통이여 오늘 15만명을 학살했음을 보고드립니다"
"히틀러가 법률이다!"

조지패튼
미국육군장군

" 전차들은 가솔린이 있는 한 앞으로만 달려가기만 하면돼. 가솔린이 떨어지면 전차에서 내려 뛰어가!"
"날 앞서든가, 날따르던가, 아니면 내 앞에서 꺼지던가."
"남자가 최선을 다했다면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용기는 1분을 더 버티게 하는 두려움이다"
"신은 내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것이다. 왜냐면 난 그렇지 않을 것이니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군총사령관

"링컨이 그랜트장군을 선택했듯이, 나는 패튼을 택한다. 그는 싸울 줄 알기 때문이다"
"개가 싸울 때 중요한것은 몸집이아니라, 싸우려는 의지이다"


체스터 니미츠

미해군장군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으로서는 16세기 말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 최초의 대패배로 끝낫다"



작자미상

"총알이 날라온 방향이 우리가 전진해야할 방향이다 "

는 2차세계대전 당시의 주옥같은 명언들중 몇가지


그리고 2차대전은 아니지만..


로이드 W. 윌리엄스 해병장교

 'Retreat, Hell'
"퇴각?미친! 우린지금 막 도착했는데! 후퇴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