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우리나라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





'6.25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열중 아홉은 1950년 7~9월 사이의 낙동강 전투라고 답할거야.
만약 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낙동강 전투 당시 북괴군이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이상을 점령하고 있엇어.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고 그만큼 위기의 순간이였어.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은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선택한 전력이였어
%EC%A0%9C%EB%AA%A9%20%EC%97%86%EC%9D%8C.JPG
낙동강 전투는 위기의 순간이기는 했어도 아구이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구축한 전략적 방어선이였어.


개전 초, 아군은 방어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전력이 앞선 북괴군이 배후로 쉽게 우회돌파 했어. 결국 증원군이 도착해서 전력의 균형을 마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어,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햐여 유엔군은 7시 외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내선의 이점이 뛰어난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어.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괴군들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수 없엇어.
이당시에 너무나도 유명한 다부동 전투등 여러 전투가 있엇지만 낙동강은 결코 뚤리지 않았어.
그렇게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갈수 있엇는데,사실상 이때만해도 북괴군이 우리한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엇어.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동안 대한민국이 처한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는지 알아?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문서들이 여러가지 공개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 중에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엇어.
1951년 1월인데 이때 무슨일이 있엇냐면,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쳣어.
지연전이라면 흥남 철수작전때 벌어진 너무나도 유명한 장진호 전투(이것또한 희생의 성격이 짙은 철수를 위한 지연전이였지)를 제외하면 지연전이고 뭐고 없이 일사천리로 달려왔을만큼 유엔군은 처음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했어.

하지만 유엔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실망했지
cache.php?url=http%3A%2F%2Fcfile222.uf.daum.net%2Fimage%2F1906C041500FD6A721C43A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피탈되었어. 이때 아군은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여차하면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싸울 생각을 했어. 하지만 천조국 본토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밀리면 완전 철군할
계획이였어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을 천조국 본토에서 준비 하고 있엇어. 12월 22일 미 합동찬모본부는 "중공의 참전의도가 한번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빨리 철수한다"는 결정을 하였던 거야.

그도 그럴것이 애초에 38도선을 돌파 하려고했을때 넘느냐 마느냐 선택의 기로에 갈렸는데 맥아더가 진격 하겟다고 했을때 유엔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개입 시켜선 안된다는 조건을 걸고 나간거였거든

구체적으로는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완전히 떠나려 했어,
더구나 이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나 일선 야전 부대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엇어.
바로 그상태에서 중공군의 제 3차 공세가 시작 되었고 아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월 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 까지 후퇴 했어.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km였어.

한달동안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않고 후퇴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만약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지난 여름에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할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어.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한 방어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조금만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 이였어.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이였어.
만약 그 상황에서 중공군이 공세까지는 아니고 공격 시늉이라도 했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컷어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였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앗을 상황이였어.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찾아와.
다행스럽게도 중공군은 유엔군의 이런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었어.
사실 중공군은 더이상 공세를 지속할수 없을정도로 힘이 소진되었고, 보급 문제로 일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 하기 힘든 부대였어.
따라서 5일정도만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엇지만 적의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은 몰랐어.

바로 이때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어.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아니였고, 단지 계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후퇴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아군의 사기를 일부나마 회복하기 위해서 당자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 했기 때문이지
1520CC4C4D2D31AC0A097F
미 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좌)

126D4D4A4D2D31BE1FD79C
울프하훈드 작전 당시의 미 27연대전투단. 비록 소규모 군사 행동 이였지만 여기서 중공군의 약점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설 수있었고 대한민국은 위기에서 벗어낫어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어.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어.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어.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어.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어.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어.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어.

115DF04B4D2D31D30DB628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어.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