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7일 일요일

해보긴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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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수 없는 전투를 이긴 지평리 전투

가장 춥고 암울하게 시작됐던 1951년.
1월이 지나가자 서서히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이 6ㆍ25전쟁에 참전한 초기에는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하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UN군을 밀어붙였으나, 그 실체를 알고보니 중공군의 전술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낯선 것뿐이었고, UN군은 중공군이 보급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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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에 문제가 많은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후퇴로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으며,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전세를 역전시킬만한 전환점이 필요하였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는 중부전선에 집결한 공산군 주력을 섬멸한다면 아군의 사기를 앙양하고 더불어 서울 탈환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따라 UN군은 1월 31일 중부전선의 홍천~횡선 축선을 따라 공격을 실시하였는데, 비록 홍천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전선을 30km이상 북으로 밀어 올리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미 2사단 23연대도 북진을 개시하여 전선의 서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양평군 지평리를 2월 3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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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은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중공군도 공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반면, 지난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 후 거의 한달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던 중공군 또한 중부전선에서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사령관 팡떠화이(彭德懷)는 2월 11일 곧바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른바 전사에 피비린내 나는 기록으로 얼룩진 중공군의 4차 공세였다. 그 결과 삼마치고개 부근에서 적과 대치하던 국군 8사단은 불과 4시간 만에 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자 전선 중앙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미 10군단은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열흘 전의 진격로를 뒤돌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지평리를 선점했던 미 23연대도 여주 인근으로 후퇴하려 하였다. 하지만 지평리를 포기하면 중부전선의 위기가 한강 남단까지 회복하며 선전을 펼치고 있던 서부전선에도 악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미 23연대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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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는 지평리 사수를 엄명하였다.>
그런데 지평리의 중요성은 펑떠화이도 똑같이 알고 있었다. 4차공세의 최종 목표는 중부전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선 전체를 37도선 이남으로 일거에 밀어붙이는 것이었으므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후퇴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차지하여야 했다결국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지평리는 대한민국의 명운을 건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장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사수명령을 받은 미 23연대장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지평리는 약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고지들이 주위를 둥글게 휘감는 분지였는데 이곳을 방어하려면 능선에 원형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대대가 증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개 대대 5,600여명의 병력만으로 완벽한 진지편성은 불가능하였다.
고심 끝에 프리만은 기상천외한 역발상을 하였다. 고지를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지평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1.6km의 구릉과 논둑을 연결하여 대폭 축소된 원형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포대를 진지 중앙에 배치하여 사방으로 포병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였다하지만 이렇게 구축한 6km 길이의 방어선 또한 4개 대대로 방어하기에는 힘겨운 상태였으며, 아군이 물러난 주위의 고지군에서 적들은 아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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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배나 많은 적들이 지평리를 포위하였다.>
단 1개 중대만을 예비대로 준비하였을 만큼 가용전력이 너무 모자랐던 미 23연대는 다량의 지뢰를 매설한 바로 뒤에 참호를 깊게 파고 전 병력을 전면 배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다.
드디어 2월 12일 원형 방어진지 사방에서 중공군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미 23연대의 4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지평리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포위한 중공군은 심야에 사방에서 출몰하여 UN군을 공격하여 공황에 빠뜨리고, UN군이 후퇴시 퇴로를 차단후 격멸하고자 하였다.
중공군은 미ㆍ프랑스군이 방어진지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이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은 미ㆍ프랑스군의 지평리 사수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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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2월 13일 밤이 되자, 중공군은 피리와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전 정면에서 동시에 아군 진지로 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고 중공군이 유효사거리까지 다가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이 유효사거리에 도달하자 155mm곡사포 6문과 105mm곡사포 18문으로 구성된 포병 화력이 일제히 중공군을 강타하였고, 적들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미ㆍ프랑스군에 비해 6배가 넘는 병력과 유리한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과오를 범하였다. 이번 공세간 중공군은 4개 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 총 4개 연대가 동원되었는데, 각 연대는 한 면씩 맡아 지평리를 포위하였으나, 서로 협조하여 공격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사방에서 각각 공격을 실시하여, 지평리 중심에 배치된 미 23연대 포병대대는 분산된 적에 대해 축차적으로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병화력만으로 적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탄막을 뚫고 접근한 일부 중공군들이 진지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지며 공격을 해왔으며, 미ㆍ프랑스군은 중공군이 사격으로 격퇴하기 힘들만큼 가까이 접근하자 일제히 착검을 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물리치는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프랑스군은 중공군의 나팔소리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적의 기세를 제압하였고, 또 적이 진지 안으로 들어와 백병전이 불가피해지자 대대장 몽클라 중령을 비롯한 프랑스 군은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적과 싸워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미 23연대장 프리만 대령 또한 중공군의 포격으로 부상당하였으나, 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는 투혼을 발휘하였다
<미ㆍ프랑스군은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2월 14일 새벽,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었으나 전날과 전투 결과는 대동소이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중공군 전사자의 시신이 점차 산을 이루어갔다. 2월 15일 02시경에는 중공군이 G중대가 담당하던 진지를 붕괴시켜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인접 부대들이 방어선을 사수하여 돌파구의 확대를 막아내었다.

한편, 전투간 미 8군사령관은 지평리 상황을 주시하며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하였으며, 14일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때는 지평리를 구하기 위해 미 9군단의 예비인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투입하였다
<크롬베즈전투단 선도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지평리에 도착하였다>

2개 야포대대, 2개 전차중대, 1개 공병중대가 증강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15일 아침 항공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난항을 겪자, 병력 160명으로 구성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3대로 공격조를 재편성해 다시 공격을 실시하였다.

결국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공격조는 중공군의 무차별 공격속에서 15일 17시쯤 드디어 미 23연대와 연결하였고, 16일 날이 밝자 지평리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지평리전투는 불굴의 용기로 얻어낸 대승이었다>

지평리전투에서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사망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의 인명 손실을 입은 반면, 중공군 5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79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려 미ㆍ프랑스군의 용맹성을 보여주었으며, UN군이 중공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로써, 38도선을 확보의 발판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공로로 프랑스 대대는 후일 한국 대통령의 부대표창과 쌍굴터널 전투에 이어 두 번째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적에게 포위당한 상태는 위험한 것이지만 결코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UN군은 지평리에서 알게 되었고 그러한 원동력은 바로 불굴의 용기였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우리나라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





'6.25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열중 아홉은 1950년 7~9월 사이의 낙동강 전투라고 답할거야.
만약 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낙동강 전투 당시 북괴군이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이상을 점령하고 있엇어.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고 그만큼 위기의 순간이였어.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은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선택한 전력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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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투는 위기의 순간이기는 했어도 아구이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구축한 전략적 방어선이였어.


개전 초, 아군은 방어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전력이 앞선 북괴군이 배후로 쉽게 우회돌파 했어. 결국 증원군이 도착해서 전력의 균형을 마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어,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햐여 유엔군은 7시 외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내선의 이점이 뛰어난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어.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괴군들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수 없엇어.
이당시에 너무나도 유명한 다부동 전투등 여러 전투가 있엇지만 낙동강은 결코 뚤리지 않았어.
그렇게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갈수 있엇는데,사실상 이때만해도 북괴군이 우리한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엇어.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동안 대한민국이 처한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는지 알아?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문서들이 여러가지 공개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 중에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엇어.
1951년 1월인데 이때 무슨일이 있엇냐면,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쳣어.
지연전이라면 흥남 철수작전때 벌어진 너무나도 유명한 장진호 전투(이것또한 희생의 성격이 짙은 철수를 위한 지연전이였지)를 제외하면 지연전이고 뭐고 없이 일사천리로 달려왔을만큼 유엔군은 처음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했어.

하지만 유엔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실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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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피탈되었어. 이때 아군은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여차하면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싸울 생각을 했어. 하지만 천조국 본토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밀리면 완전 철군할
계획이였어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을 천조국 본토에서 준비 하고 있엇어. 12월 22일 미 합동찬모본부는 "중공의 참전의도가 한번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빨리 철수한다"는 결정을 하였던 거야.

그도 그럴것이 애초에 38도선을 돌파 하려고했을때 넘느냐 마느냐 선택의 기로에 갈렸는데 맥아더가 진격 하겟다고 했을때 유엔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개입 시켜선 안된다는 조건을 걸고 나간거였거든

구체적으로는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완전히 떠나려 했어,
더구나 이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나 일선 야전 부대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엇어.
바로 그상태에서 중공군의 제 3차 공세가 시작 되었고 아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월 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 까지 후퇴 했어.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km였어.

한달동안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않고 후퇴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만약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지난 여름에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할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어.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한 방어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조금만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 이였어.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이였어.
만약 그 상황에서 중공군이 공세까지는 아니고 공격 시늉이라도 했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컷어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였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앗을 상황이였어.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찾아와.
다행스럽게도 중공군은 유엔군의 이런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었어.
사실 중공군은 더이상 공세를 지속할수 없을정도로 힘이 소진되었고, 보급 문제로 일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 하기 힘든 부대였어.
따라서 5일정도만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엇지만 적의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은 몰랐어.

바로 이때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어.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아니였고, 단지 계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후퇴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아군의 사기를 일부나마 회복하기 위해서 당자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 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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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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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하훈드 작전 당시의 미 27연대전투단. 비록 소규모 군사 행동 이였지만 여기서 중공군의 약점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설 수있었고 대한민국은 위기에서 벗어낫어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어.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어.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어.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어.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어.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어.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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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어.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