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1951년 한국 전쟁 고지전




한국전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두 알고 있을거야

전쟁초기엔 낙동강까지 북괴군에게 밀리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통일 직전까지 갔다가 중공의 개입으로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었지

사실 휴전회담이 오가며 전선이 고착화 된 시기가 전쟁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해

휴전회담이 오가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땅을 더 따먹기 위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싸우는 소위 고지전이 이 시기의 주요 전투였지

그 중에서도 강원도 부근, 특히 양구에선 1951년에 한국전쟁 최대의 고지전이 벌어졌어




도솔산 전투 (1951. 6. 4 ~ 1951. 6. 19)

아군 : 한국해병대 제 1연대
적군 : 북괴 공산군 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60fed1d2fb6395808e9aa2974527f505.jpg

양구 지구 전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전투는 양구와 인제 사이에 위치한 해발 1000m 이상의 봉우리가 즐비한 도솔산에서 벌어졌어

당시 양구는 지금과 달리 중공과 북괴의 손에 넘어가있었고, 험준한 산맥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지

하지만 이 고지를 잇는 방어선 때문에 여의도의 6배에 달하는 분지가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있었고,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당한 형태였지

또 경기도부근 전선은 휴전회담이 직접 진행 중이어서 영토확장이 어려웠지만 강원도는 휴전회담 진행 중에도 계속해서 전투가 가능했어

f5130844af07faa9cf4951eeae1646a3.jpg

도솔산은 특히 양구, 인제를 관통하는 도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꼭 점령해야한다고 판단한 UN군은 공격을 시작해

처음엔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가 공격을 했지만 실패하고 한국해병대 1연대가 교대하여 공격을 시작했어

당시 미군은 강력한 포병 지원과 폭격을 바탕으로 공격했지만 험준한 산에 벙커를 지어놓은 빨갱이들에게 별 피해를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어

이를 착안한 한국해병대는 낮에 포격지원을 바탕으로한 점령전을 야간 기습공격으로 바꾸어 공격했어

그리고 고립된 적을 3개 대대가 번갈아 공격하는 식으로 적의 물자를 바닥내고 피로도를 극대화하는 전략에 북괴는 결국 GG를 치고 도솔산에서 후퇴하게 돼

이 전투는 해병대 5대 전투로 기록에 남게되고, 미군이 못한 일을 우리 국군이 해냄으로써 나름대로의 위상을 높였어. 거기에 도솔산을 점령하여 빨갱이들의 방어선은 약 10km 후방으로 밀려나.


해병대 1연대는 123명 전사를 포함한 7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북괴군 2000여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해서 대승을 거뒀다고해도 무방해



대우산 전투(1951. 7. 15 ~ 1951. 7. 31)

아군 : 미군 제 2사단 38연대, 23연대, 네덜란드 대대, 국군 해병대 1연대
적군 : 북괴 공산군 제 27사단 32연대

도솔산을 탈환한 해병대는 계속되는 공방으로 피해가 일어나자 미군과의 교대를 요청해

그러나 교대를 1주일 앞두고 대우산을 점령을 위한 작전이 시행되고 1연대가 모두 육탄전을 펼친 끝에 중간지점을 점령했어

임무를 마친 해병대는 곧 미군 2사단, 네덜란드 대대와 임무를 교대했어

그리고 잠깐의 평화 중 짱깨들이 휴전회담을 거부하자 유엔군은 짱깨들을 회담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다시 공격을 시작했어

UN군은 100톤이 넘는 폭탄을 퍼부었지만 버로우한 북괴는 이를 버텨냈어

빡친 천조국 성님들은 전략을 바꿔...는 개뿔 폭탄을 더 퍼부어서 결국 북괴군을 물리치고 대우산을 점령했어

이 작전으로 UN군은 적 3690명이 사살했고 55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나, 전사, 실종 205명을 포함한 946명의 피해를 봤어.



피의 능선 전투 (1951. 8. 18 ~ 1951. 9. 7)

아군 : 국군 제 5사단 36연대, 미군 제 2사단
적군 : 북괴 공산군 제 27사단

090610_Blood_Ridge_3.jpg

중공은 결국 회담장으로 오지 않았고, 장마가 끝나자 다시 전투가 시작됐어

연합군은 983-940-773고지로 이루어진, 후에 피의 능선으로 명명되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어

먼저 국군 5사단36연대가 선제공격을 시작했지만 북괴의 지뢰밭에 전진이 힘들어 작전에 실패.

지뢰밭 민주화를 위해 미2사단이 지뢰밭에 포격을 가했지만 지뢰로 도배를 해놨는지 여전히 남아있는 지뢰에 다시 작전은 실패해

결국 국군은 정면공격을 포기하고 983고지를 우회해 940, 773고지를 기습공격했어

지뢰밭만 믿고 뻥커에서 놀던 북괴는 순식간에 후장을 대주며 모든 고지를 내줬어

그러나 국군의 피해도 심각했고 북괴가 다시 재정비 후 공격할 것을 예상한 연대장은 미군과 교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고, 북괴의 재공격에 포위당하고 다시 983고지를 내주게 됐어

이후 포병전력을 강화한 36연대는 포격을 바탕으로 미군과 합동공격해서 983고지를 재점령하며 전투는 막을 내렸어.


4a2fd7faf89c7570dd4ff88408cafc4e.jpg


이 전투로 국군은 1000여명, 미군은 2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북괴군은 15000여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전투 중에 화력지원을한 미 2사단은 하루 평균 3만발의 105, 155mm 포를 발사했고 미군 지휘관은 '한국전 발발 후 가장 많은 포를 쐈다'고 했으며 능선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여 종군기자들이 '피의 능선'이라 이름붙였지...

cache.php?url=http%3A%2F%2Ffile.agora.media.daum.net%2Fpcp_download.php%3Ffhandle%3DMW1tbFh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RDAwMy85Lzk1Ny5qcGc%3D%26filename%3Dpostx-taegukgic.avi_001883006.jpg

참고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마지막에 장동건과 원빈이 만나는 전투가 바로 이 피의 능선 전투야






펀치볼 전투 (1951. 8.30 ~ 9.20)
  
아군 : 미군 제 1해병사단, 국군 제1 해병연대
적군 : 북괴 공산군 제 1사단

 718e2a4ccb3170f35af4ff169b73c5ce.jpg

휴전회담이 드디어 재개되자 이번엔 조금이라도 영토를 더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이 펼쳐졌어.

그림에서 볼 수 있겠지만 펀치볼이라는 거대한 분지와 그 옆을 지나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선 펀치볼 위의 고지라인을 꼭 점령할 필요가 있었지

이를 위해 유엔군은 펀치볼 일대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로써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시되어 펀치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어

 펀치볼 일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국군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 였어. 비록 불리한 지형과 적의 지뢰, 탄막공격 등에 피해를 입었으나 포병화력, 항공지원에 힘입어 효과적으로 적을 격퇴하였고 적 1사단을 격멸하며 비슷한 시기의 두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작전을 마무리 지었지

전투로 적 2799명 사살, 포로 557명의 성과를 냈으며 전사 428명, 부상 1062, 실종 3명의 피해를 입었어

1cc8623b9de3ab81f0fb010805fd6b44.jpg




가칠봉 전투 (1951. 9. 4 ~ 1951. 10. 14)
  
아군 : 국군 제 5사단 27연대
적군 : 북괴 공산당 제 12사단, 27사단

 4d3747a43ae7112c4c36427b86e57636.JPG

금강상의 마지막 봉우리인 가칠봉에서 펼쳐진 가칠봉 전투는 펀치볼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개시되었어. 

5사단 27연대을 전력으로 1122m의 김일성 고지를 중심으로한 가칠봉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피아 간 전선 거리가 너무 가까워 대포병, 항공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로 개시되었지

북괴군은 견고한 진지와 고도의 이점을 통해 고지를 지켰지만 육탄전을 불사한 공격에 결국 고지를 내줬어. 그러나 곧바로 야습으로 고지를 내준 국군은, 이후에도 육탄전을 반복하며 6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고지를 사수하며 전투에서 승리하게 돼

북괴 1102명이 사살되고 250명의 포로가 잡혔지만 아군도 전사 692명, 실종 437명의 큰 피해를 입었어

3dcc1f316ab3e2e4f2955ec36373cc77.jpg

이건 2010년 가카가 가칠봉 OP를 방문했을 때 사진이야
나는 저기 옆에 옆에 있던 라인이었음^^ 우리한테 안 와서 다행.
말년에 스타워즈 볼 뻔했다


단장의 능선 전투 (1951. 9. 13~ 1951. 10. 13)

아군 : 미 10군단 예하 제 2보병사단,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적군 : 북괴군 6, 12, 13사단, 중공군 204사단

8a33f49cc6de06f90282d5a78900cc16.jpg

피의 능선 전투에 승리한 미 2사단은 다음 공격목표인 양구 북방 문등리의 894, 931, 851 고지로 이루어진 능선을 공격했어

처음에는 미2사단의 정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북괴 6사단의 강렬한 저항에 막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아. 그러나 이후 공격루트를 바꾸고 기갑전력의 30만발에 달하는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바탕으로 반격해 1개월 간의 사투 끝에 931 고지를 점령하며 전투를 끝내

이 전투를 보도한 종군기자가 부상병이 "심장이 끊어지는 것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Heart Break Ridgeline이라는 호칭이 붙였지.

전투로 UN군은 3700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고 북괴군은 2만5000명에 달하는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 돼. 

여담이지만 23연대 휘하로 참여했던 프랑스대대의 대원이 자신의 유골을 전우가 죽은 단장의 능선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겨, 2007년 육군이 유언대로 뼈를 뿌려주었어

  9c52f7a83bed5ff19f4bfa3ca90e1a45.jpg
5e3b28c064c8c22df3c691b2c4859d9d.jpg



백석산 전투 (1951. 9. 24 ~ 1951. 10. 1)

아군 : 국군 제 7사단, 8사단
적군 : 북괴군 12, 32사단

5da43db1b72a846c5f21f09c85f2c594.jpg

위의 전투들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고 백석산 일대를 수복하고, 단장의 능선, 가칠봉 일대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이후 어은산에 대한 공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어 

최초에 7사단이 32사단을 상대로 작전을 전개하여 1142고지를 탈취하였지만 곧 반격을 받아 4일 만에 다시 후퇴하고,
8사단이 뒤를 이어 공격을 개시하여 2일 만에 고지를 탈환했어

전투결과, 아군은 전사 244명, 실종 14명을 포함 1423명의 피해를 입었고 북괴군은 1561명의 사살, 포로의 피해를 입었어

이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진지 강화에 힘썼지만 곧 휴전회담이 진척을 보이며 전선은 안정화 되면서 양구일대의 주요고지전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됐어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1951. 12. 25 ~ 1951. 12. 28)

아군 : 국군 제7사단
적군 : 중공군 204사단

 34e235b34f920ff1f1ba74ce0461865a.jpg

195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방심하던 때를 틈타 중공군 204사단이 1090고지에 주둔 중이던 7사단에 포격을 가하며 전투가 시작됐어 
휴일을 틈탄 휴전회담 중 군사분계선 잠정 합의를 무시한 공격이었지

갑작스러운 기습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7사단은 효과적으로 고지를 방어하며 1951년 양구의 마지막 고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어. 이 전투로 중공군 172명을 사살하고 5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국군도 전사22, 실종21의 피해를 입었어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북한의 도발 56함 피격사건


함교는 피로 물들었다.

함수갑판 중갑판 함미갑판 어디건 전사자와 중상자들이 뒹굴었다.

주포인 3인치 포신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함체는 이미 크게 기울었다.

피투성이 함장과 포술관은 고통에 찡그리면서도 고함을 질러댔다.

“위치를 사수하라!” … “쏴라! 연막탄이건 뭐건 다 쏴라!”

한낮이었다. 태양이 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다엔 풍랑도 별로 없었다. 그 멀쩡한 시간, 대한민국 해군 56함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강원도 금강산이 보이는 어로저지선 인근 해상이었다.

1967년 1월19일, 정확히 오후 2시34분이었다.


해군 56함, ‘당포’호는 그 전해 12월28일 진해기지를 출항했다.

동해 해상 휴전선 인근 명태어장에서 어로보호 임무를 하고 1월15일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명태 어획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출어일수가 줄어 평년 어획량 6,600톤보다 1,000톤이나 감소했다.

11월1일부터 3만3천여 척의 배가 나선 걸 감안하면 형편없는 실적이었다.

당국은 어로저지선 인근 명태 잡이를 1월 말까지 15일간 연장했다.

설마 이것이 56함의 최후를 불러오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작전기간이 연장된데 대해 승조원들도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적전 해상근무의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기대 어획고를 올리지 못한 어선들이 고기떼를 따라 북상, 해상 휴전선을 넘나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날(1967년 1월 19일)도 동해바다엔 어선 수백척이 명태 어장에 몰렸다. 날도 청명했다.

부진했던 실적을 만회하려고 어선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던중 어선 70여 척이 어로저지선을 지그재그로 넘어 들어갔다.

56함은 이들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남쪽으로 선수를 틀도록 유도했다.

그러던 오후 1시 반, 수원단(북괴 장전항 인근 해안 돌출부) 동방 6마일에 북괴 경비정 2척이 나타나 선단 쪽으로 접근했다.















수원단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북괴 경비정 2척은 우리 어선단의 납북을 기도하였다.




이에 56함은 북괴함정의 납북작전을 목격하고 우리 어선단을 남하시키기 위하여

수원단 동남쪽으로 4, 5마일 가량 떨어진 해상으로 진출, 어선들을 즉각 남하시켰다.

그로부터 꼭 30분 후인 오후 2시.

56함은 “본 함, 육상 포와 교전 중”이란 긴급무전을 보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56함이 보낸 마지막 신호였다.

56함은 북괴 함정이 명태선단에 접근하자 이를 어선 납치 기도로 보았다.

함장은 즉각 “우리 어선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괴 함을 막고 어선들을 더 북상 못하게 추스르며 내려 보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괴 해안 절벽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대함포가 발사된 것이었다.








북괴의 수원단 포대는 ‘나바론의 요새’처럼 위장돼 있었다.

절벽 속에 동굴을 파고 레일을 놓아 포를 갑자기 돌출시켜 바다 위 목표물을 타격하게 돼있었다.

물론 동해 경비에 나선 우리 해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느닷없이 표적사격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물기둥이 치솟자 함장은 ‘전투배치’를 발령하고 엔진을 모두 가동, 전속력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후부기관실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기관실 맞았습니다, 감속 기어 파손…”이란 보고와 “탄약고 불 붙었습니다.”란 보고가 동시에 함교로 전달됐다.

그리고 이어 전부기관실에 또 한 방을 맞았다.

첫 번째 포탄을 맞고도 표적에서 벗어나려고 지그재그로 달리던 배가 뚝 멈췄다.

수병들은 3인치와 40mm 기관포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적 포대를 향해 포를 쐈다.

사정 시야를 가리려고 연막탄도 터트렸다.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때 56함은 20여분간에 걸쳐 200여발의 집중포격을 받았다.

이승무 중위는 통신실이 포격으로 부서지자 비상통신실로 달려가다 작렬하는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포탄에 다리가 떨어져 나간 하사관, 복부에 파편을 맞아 장이 쏟아져 나온 수병, 몸 가득 파편이 박힌 장교들이 갑판 여기저기서 신음했다.

기관실을 복구하러 들어간 기관장은 배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함장에게 “침수 중입니다. 퇴함해야 합니다.”고 소리쳤다.




















(실제 53함과는 무관함)

그 때 급히 56함을 구출하기 위해 한국해군의 53함이 다가왔다.

이때 북괴의 해안포는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나 56함이 구명정을 내리는 순간 다시 포격을 개시했다.

처음 준비한 포탄을 다 쏘고 새로 장전한 모양이었다.

이에 53함은 3인치 함포 등으로 100여발을 쏘면서 응전하였으나,

이미 포탄이 56함의 선체와 기관실을 대파한 다음이어서 속수무책이었다.






(56함의 최후,40분동안의 필사의 교전)

해군은 그날 북한이 56함을 향해 286발을 쏘았다고 밝혔다.

북괴 해안포대가 포격을 완전히 멈췄을 때 배는 절반 이상 가라앉아 있었다.

함수 앵커 부분에 몰려있던 장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함장 김승배 중령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부상한 수병에게 입혀 구명정에 태운 뒤

마지막으로 생존자가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56함의 침몰)

바다로 뛰어든 해군들중 전탐 근무자 정완섭 병장은 극비서류인 전탐일지를

허리띠 아래에 묶은 뒤 바다에 뛰어들어 53함에 구조됐다.

암호사 김영석 하사는 전 해군 공용 암호 문건을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함께 수장시켰다.

가지고 탈출하다 적에 잡히기라도 하면 암호가 누출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구명정에 탔거나 바다에 뛰어내린 51명이 달려온 해군함정에 구조됐다.

그러나 그중 11명은 이미 숨진 채였거나 구조 직후 숨을 거뒀다.

작전관 포술관 등 장교 2명을 포함해 28명은 침몰한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애초 출항한 진해기지로 영원히 귀대하지 못했다. 그들이 제 몸보다 아끼던 애함 56함과 함께였다.








시퍼런 대낮 어로보호 경비함이 격침된 대참사가 일어나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오후 5시 청와대에서 긴급안보회의가 열렸다.

정부대변인은 “호전적 침략근성을 드러낸 북괴는 응분의 대가를 각오하라”며 ‘모종의 응징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이튿날 유엔군사측은 군사정전위 본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북측에 ‘살인적 함정 격침 행위에 대한 공동조사’를 제의했다.

유엔의 입장은 단호했다.

“56함은 아무런 적의와 도발행위 없이 한국어선단을 남쪽으로 인도하는 중이었는데 북이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는 엄연한 휴전협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부인했다.

“56함이 휴전선 북측 연안을 침범했고 격침은 자위행위”였다는 것이다.

또 56함이 먼저 함포사격을 해왔으며 침몰 전후해 유엔 측 비행기와 함선이 북한의 영해와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공동조사’를 다그쳤고 북측은 56함의 월선과 자위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는 사이 정부는 공언했던 ‘모종의 응징책’의 1단계 조처 내용을 발표했다.

1)북의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고
2)우리 어선의 북상 어로를 금지하며
3)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만행을 응징하는 대책을 세우면서
4)대형 함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침몰 6일째인 25일 어로저지선 근해에서 포탄 파편으로 헤지고 얼룩진 25인승 구명보트를 어선들이 발견해 속초로 예인했다.
56함의 좌현에 실렸다 침몰 후 떠오른 것이었다.

바다 속 56함이 수면 위로 보낸 단 하나의 유품이었다.

유엔군과 한국 해군 공군들은 사고해역에서 몇 날 며칠을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승조원 시신은 물론,

56함으로부터 나온 어떤 부유물도 찾지 못했다. 북측은 이들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56함 전몰 장병 국립묘지에 안장)

1월27일 오후 2시 ‘당포’함 전몰장병 영결식이 진해 한국함대 사령부에서 열렸다.

박태만 이승무 중위에겐 충무무공훈장이, 김경수 상사 등 37명에겐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전사자들은 또 모두 1계급 특진 추서됐다.

이튿날인 28일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장병들의 국립묘지 안장식이 현충원 해군묘역에서 열렸다.

유해조차 못 찾은 28 장병들은 유품만 묻혔다.

2월9일, 국방부는 해상 어로보호임무를 내무부와 농림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4월27일. 해군은 56함을 대체할 고속 경비정 1척과 초계호위함 1척을 미국으로부터 인수했다.
그날은 또 56함 격침 현장 인근 해역 DD 91함 함상에서 전몰장병 진혼제가 열린 날이었다.

56함 참사는 1월 말까지는 그래도 언론에 보도됐으나 2월 들어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67년 말 어로저지선에서 조업하던 어선 39척과 어부 340여명이 납북됐을 때,

또 이듬해 해군 방송선이 납북됐을 때 56함의 기억이 다시 국민에게 살아났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지금도 동해바다 깊은 해저에는 56함이 잠자고 있다.

그후 43년후 북한은 또 한번 도발을 감행했고

40명이 전사 6명이 실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천안함 침몰)